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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신 투표는 곧 사표’라고 우겨대던 20대의 내가 떠올랐다.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내가 사랑하는 생명이 스러져 가는데, ‘그 생명 귀하다’고 말하는 이에게 표를 주는 게 당연했다. 이기지 못할 후보에게 표를 주지 말라고? 그런 나의 삶은 승리로만 이루어져 있었나? ‘질 것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없던 순간’이 내겐 없었나?”
유권자 서계수(33)씨는 2025년 5월29일 사전투표를 마치고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런 글을 올렸다방림 주식
. 골수 더불어민주당원이던 그는 이번 대선에서 처음으로 민주당이 아닌 후보에게 표를 줬다. 그가 뽑은 사람은 기호 5번 권영국 민주노동당 후보. 한때 “정의당을 미워했던” 서씨가 마음을 바꾼 계기는 두 가지였다. 언제나 ‘나중’으로 밀리는 차별금지법, 그리고 자신과 같은 노동자들이 수없이 산업재해로 스러지는 현실이었다.
“내란 이후 광장에2000만원재테크
나가면서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 나를 위해줄 거라는 믿음이 깨졌거든요. 더는 ‘저쪽이 되면 안 된다’는 공포만으로 투표하고 싶지 않더라고요. 이제는 ‘나를 위해 싸워준 사람을 외롭게 두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컸어요.”



장혜영 공동선대위원장(왼쪽)과 권영국 후보(오른쪽)가 하이닉스목표가
시민과 함께 기호 5번을 의미하는 다섯 손가락을 펼치고 있다. 권영국 후보 페이스북 갈무리


하지만 권영국 후보의 최종 득표율은 0.98%. 4400만 유권자 가운데 34만4150명만이 그에게 표를 줬다. 서씨는 후회했을까. “늘 이기는 쪽에 서고 싶던 저로서는 확률이 낮은 쪽에 거는 사람들 마음을 보성파워텍 주식
이제야 알겠더라고요. 이런 마음으로 매번 했구나. 다른 세상을 요구하는 그 마음이 얼마나 절박했을까 생각했어요.그래도 권 후보 지지를 호소하는 제 글을 읽고 선택을 바꾼 지인도 있어요. ‘한 사람을 돌릴 수 있었으니 됐다’ 생각했죠. 어쩌면 그 사람들도 이런 마음으로 계속해왔는지 모르겠어요. 저 같은 사람 한 명 마음을 돌린다는 게, 숫자론 작아 보이지만 기본예탁금
그 사람의 세상이 바뀌는 일이니까요.”
0.98% 후보에게 날아든 후원금 13억
민주노동당의 대선 레이스가 끝났다. ‘거대 양당에 종속되지 않는 독자 진보 노선’을 내걸고 노동·녹색·정의당 3당이 공공운수노조 등 노동조합, 플랫폼C 등 시민단체와 뜻 모아 배출한 대선주자다. 득표율은 1%를 넘기지 못했지만 2025년 6월3일 저녁 8시 선거가 끝나자마자 몇 시간 만에 후원금은 13억원 넘게 들어왔다. 2022년 대선 직후 심상정 전 대선 후보가 받은 후원금(12억원)보다 많다.
“2022년 대선 때는 이번 지지율의 두 배(2.37%)였는데도 분위기가 훨씬 침체돼 있었거든요. 그때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느꼈어요. 사회운동과 다시 가까워지고 진보정당의 길을 스스로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요.그런데 내란사태 이후 모처럼 진보정당과 사회단체가 머리를 맞대면서 새로운 시작점이 만들어진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의 말이다.



권영국 민주노동당 후보가 5월31일 충남 태안을 찾아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412행진’에 참석했다. 권 후보 페이스북 갈무리


여러 단체가 모인 공통분모는 ‘독자적 진보의 생존’이었다. “2024년 비례위성정당 사태(더불어민주당이 다수 의석 확보를 위해 진보당·사회민주당·기본소득당 등을 위성정당에 편입시킨 사건)를 거치면서 ‘양당으로부터 독립된 진보정치가 성공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직면했어요. 대중적 가시권으로 들어가면 살아남을 순 있겠지만 진보성을 잃어버리는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결국은 ‘우리 힘으로 존재 가치를 확인시켜야 한다’는 거였죠.” 이백윤 노동당 대표의 말이다.
‘광장을 이어야 한다’는 절박함도 있었다. “여기서 또 광장의 종말이 온다면 사람들의 열의도 꺾이고 촛불 혁명 실패보다 훨씬 더 큰 파장으로 올 거라 생각했어요. 어떻게든 진보 정치의 불씨를 살려놓아야 한다는 간절함이 있었고요. 그래서 진보 정치 노선을 함께 살리고 그 토대 위에서 사회 불평등 해소와 공공에너지 대책, 노동권 의제를 부각하는 게 중요했어요.” 이상현 녹색당 대표가 말했다.
과거보다 또렷해진 진보정치 존재감
이번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의 출발은 2025년 4월16일에야 시작됐다. 여러 단체가 모여 공동 의결 절차를 밟느라 다른 당보다 출발이 늦었다. 총 대선 기간 48일. 정치 신인에 가까운 권영국 후보의 대중적 인지도를 끌어올리고 언론의 주목도를 얻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낮은 지지율은 그런 현실의 “정직한 결과”였다.
하지만 진보정치의 존재감은 과거보다 또렷해졌다. “지금 민생 위기에 불평등도 심화했잖아요. 진보정치가 그런 삶의 위기를 적극적으로 이야기해야 기존 정치에 환멸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갈아엎자 불평등 세상’ 구호가 좀 과격한 듯해도 그런 기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그냥 세련되고 유연한 슬로건으로는 전혀 존재감을 드러낼 수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홍명교 활동가가 말했다.
그 ‘기세’로 그는 일상 속 풀뿌리운동을, 대중과의 접점을 다시 찾자고 제안한다. “진보 정당의 위기는 사실 시민사회운동의 위기이기도 해요. 이젠 노동단체도 노동자 정치세력화 얘길 안 하잖아요. 뉴미디어 시대에 사람들에게 다가갈 매개도 별로 없고요. 지치지 말고 함께 그런 것들을 계속 고민해 가자고 말하고 싶어요.”



권영국 민주노동당 후보가 지지자들과 함께 거리에서 유세하는 모습. 권 후보 페이스북 갈무리


권 후보의 대선은 기존 양당이 꺼리던 의제를 타협 없이 선언했다는 의미도 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과 비동의강간죄 제정을 촉구했고 이주민과 폐업 위기 자영업자, 장기 고공농성자를 만났으며 혜화역 장애인 이동권 투쟁에 함께했다. 유일하게 동물‘복지’가 아닌 동물‘권리’에 관한 공약을 냈다.
기득권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운동의 필요성을 스스로 어필하는 과정이었다. 권 후보가 수요시위에 나타난 극우세력을 향해 “네 이놈 조용하지 못할까”라고 소리친 장면이나, 티브이(TV) 토론에서 “왜 이준석 후보는 장애인 차별과 싸우지 않고 장애인과 싸우느냐” “이재명 후보는 영원히 차별금지법 제정을 못할 것 같다”고 말한 장면이 이슈가 됐다. 약자를 조롱하거나 방치하는 현실 속 ‘약자 연대’라는 진보정치의 노선을 명확히 했다는 평가다.
양당이 꺼리던 의제, 타협없이 선언
진보의 선명성은 그간 무당층 표심을 떨어뜨리는 악조건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실제로 그랬을까. 오히려 기존 질서와 차별화된 모습에 매력을 느끼고 표를 준 사람도 있다.“민주노동당이 지난 지방선거에서 득표율 3%를 넘겼기 때문에 방송 토론 자격이 주어졌잖아요. 다음 대선 때도 권 후보 같은 사람을 TV토론에서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뽑았어요. 다른 후보들은 서로 네거티브 선전만 계속하는데 권 후보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들에 집중하는 모습이었거든요.” 유권자 김원식(45)씨가 말했다.
김씨는 권 후보의 차별금지법 제정 공약에 특히 주목했다. 약자를 조롱하는 사회문화를 바꾸려면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봤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로 표를 몰아주자는 ‘압도적 승리’엔 동의하지 않았다. “저는 이재명 후보의 득표율이 내란 종식의 결정적 변수라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내란 종식은 대통령의 의지가 중요한 거고, 저는 제 표가 어디에 쓰였을 때 가장 기분 좋을까를 기준 삼았거든요. 그 선택이 권 후보였어요.”
“이재명과 더 차별화했어야” 쓴소리도
오히려 진보정치가 성공하려면 더 선명한 독자 노선을 걸어야 한다는 제언도 있다. “권 후보가 양쪽 모두와 차별화하는 노선을 걸었다면 표를 더 얻었을 거라 봐요. 이준석 후보는 양쪽 후보를 비판하며 확실하게 독자 노선을 걷는데 권 후보는 이재명 후보에 대해선 애매했어요. TV토론을 봐도 자기 농사를 지어야 하는 타이밍에 (이재명 후보와 중복되는) 내란 종식을 강조한다든가, 김문수 후보한텐 각을 세우면서 이재명 후보한텐 다소 부탁하는 식으로요. 물론 이재명 후보와의 차별화를 시도하면 공격받겠지만, 진보정당이 그 두려움을 이겨내야죠.”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대표의 말이다.
오 대표는 “정책적으로는 권 후보의 공약에 차별성이 있었다”며 권 후보의 병원비 100만원 상한 공약과 부동산 보유세 강화를 짚었다. “지금처럼 부동산 가격이 높아진 상황에서 보유세조차 손보지 않으면 조그만 자극에도 가격이 뛸 거거든요. 여기서 자산 가격 폭등이 또 일어나면 그땐 정부가 위기를 관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민들이 분노할 겁니다.”
차이를 조율하며 ‘연대’ 더 단단하게
민주노동당의 대선은 다양한 운동 주체가 한데 뭉치며 차이를 조율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독자 진보 노선’이라는 빅텐트 아래 모였지만 제각각 의제에 대한 인식 차이가 컸고 조율할 시간도 충분치 않았다. 5월 초, 권 후보의 기후공약이 충분히 진보적이지 않다는 비판이 제기됐다.이미 기후활동가들 사이에선 큰 효용이 없다고 여겨진 ‘탄소세 도입’이 포함됐고 에너지 전환의 공공 역할도 강조되지 않아서다. 비판이 커지자 권 후보 캠프는 기후정의동맹 및 녹색당과 토론회를 한 뒤 공약을 바꿨다. 기후위기 책임이 큰 대기업과 부유층에 증세(‘기후정의세’)를 약속하고 재생에너지 전환의 주체가 공공임을 명시했다.



민주노동당 권영국 대선후보를 비롯한 사회대전환 선거대책위원들이 2025년 6월4일 서울 구로구 민주노동당 당사에서 열린 제21대 대선 결과 입장 발표 기자회견을 마친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선거운동 시작을 늦춰가며 공동 논의 절차를 착실히 밟은 게 유산이 됐다. “대선 전부터 공동 정책을 논의했거든요. 그러다보니 대선 과정에서 내용이 바뀌었을 때 그걸 판단하고 수정하는 근거가 된 것 같아요.양쪽 입장만 가지고 다퉜다면 답이 없는 문제여서 캠프가 주도해서 끌고 갈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사회대전환 연대회의라는 연합체가 있었기에 수정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이상현 대표가 말했다.
광장의 교훈은 진보 의제가 다른 듯해도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점이다. 구준모 기후정의동맹 집행위원은 진보의 합종연횡 실험이 앞으로도 계속돼야 한다고 본다. “현실적으로는 운동의 영역이 나뉘어 있죠. 노동·여성·환경 운동 등으로요. 그런데 실제로는 이런 주제가 서로 칸막이 쳐져 있거나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한국 사회를 어떻게 더 진보적이고 바람직하게 변화시켜 나가느냐는 문제로 긴밀하게 엮여 있거든요. 그래서 함께 만들어가고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번 대선도 그걸극복하고 넘어보려는 시도였다고 생각하고요.앞으로도 계속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